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센트 반 고흐 (문단 편집) ==== 뇌넨 시절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www.apollo-magazine.com/Untitled.png|width=100%]]}}} || || {{{#white '''1883년 5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 1883년 9월, 헤이그에서 시엔과 결별한 고흐는 드렌테 남부의 호헤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고흐는 알베르튀스 하르트소이케르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숙하며 화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곳에서 보름 후에 화가들이 있다는 곳을 전해들은 고흐는 다시 호헤벤에서 니암스테르담까지 가게 된다. 니암스테르담에서 고흐는 운하의 도개교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d3l2rivt3pqnj2.cloudfront.net/213463.jpg|width=100%]]}}} || || {{{#white '''일하는 사람 1883'''}}} || 이 시점에서 고흐는 유화를 그리고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법상으론 '''물감으로 소묘를 하는''' 것이라서 유화라고는 해도 결국 소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직 고흐는 색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는 미숙했던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고흐는 혼자서 그림의 기법을 익혀나갔다. 외딴 시골의 황야와 습지에서 고흐는 순수한 자연을 동경하면서 고독하게 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림 실력에 다른 화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동생 테오가 구필 화랑을 때려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자적으로 화랑을 세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고흐는 놀라서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뇌넨으로 옮겨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12월에 뇌넨으로 가게 된다. 뇌넨에서 고흐는 그리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시엔의 일로 아버지를 존경하던 마음이 싹 가셔서 아버지의 신앙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던 고흐와 작은 동네 뇌넨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고흐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간의 감정이 편치는 않았겠지만. 안 그래도 힘들던 아버지는 고흐의 가혹한 반감에 더 힘들어지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와 대화 끝에 잠정적으로 타협해 아버지를 격하게 비난하지 않는 대신 고흐의 기행을 놔두기로 해서 평화가 찾아왔다. 당초엔 드렌테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고흐는 뇌넨에 눌러 살기로 마음을 바꾸고 목사관 뒤뜰의 헛간을 아틀리에로 삼아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드렌테에서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였던 그림은 뇌넨에서 다양한 색채가 더해져 좀 더 발전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가족들과 불편하던 사이는 어머니가 부상을 입는 불상사로 인해 화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처녀 마르호트 베흐만이 고흐에게 반한 것은 문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동생 테오는 결국 형 때문에 굴복하여 구필 화랑에 남아서 계속 형을 후원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고흐가 소묘와 유화를 파리로 보내면 테오가 그것을 구입하는 식으로 일종의 봉급을 주라는 과도한 요구에도 테오는 승낙했을 정도다. 게다가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졌고 고흐는 마르호트 베흐만과의 관계 때문에 아버지의 걱정을 더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고흐는 목사관을 나와서 뇌넨의 성당 관리인이던 요한네스 스하프라트에게 방을 빌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고흐는 이곳에서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거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우면 산책하면서 가져온 갖가지 잡동사니를 가지고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마르호트 베흐만은 고흐에게 푹 빠졌고 이는 말썽을 야기했다. 마르호트의 집에선 고흐의 꼬락서니 때문에 고흐에게 마르호트를 줄 생각이 없었고 이는 고흐의 가족들도 매한가지였다. 고흐 자신도 마르호트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것 때문에 그녀를 별로 가까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고흐와의 연애가 제대로 되지 않자 불안정하던 마르호트의 정신이 그만 폭발해 독을 마시고 신경발작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작은 마을에서 이는 심각한 스캔들이었고 고흐는 뇌넨을 잠시 떠나 아인트호벤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data-cache.abuledu.org/les-mangeurs-de-pommes-de-terre-505dcf43.jpg|width=100%]]}}} || || {{{#white '''[[감자 먹는 사람들|{{{#white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런저런 우여곡절들이 있던 가운데 고흐는 이때까지의 작업들을 총결산하는 의미의 대작을 구상하게 된다. 대작의 실마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는데 1885년 3월의 어느 날에 고흐는 호르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치다가 그 집에 들어갔다. 그때 호르트의 가족들은 석유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었다. 고흐는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이런 와중에 3월 26일, 고흐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 나타난 삼촌들이 고흐를 마구 쪼는 가운데 고흐는 그나마 테오의 위로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런 우울한 시점에 고흐는 하나의 정물화를 그렸는데 꽃병에 꽃을 꽂고 아버지의 파이프 담배와 담배쌈지를 놓은 정물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누그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고흐는 창작열이 쇠퇴했다. 이를 만회하려고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색채론을 탐독했다. 이런 가운데 미완성이던 감자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감자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전기를 정리하는 대작이자, 고흐가 보리나주에서부터 그토록 원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의 성취였다. 물론 헤이그 시절에 사귄 화가 친구 반 라파르트는 이 그림을 밀레식으로 해석해 엄청난 혹평을 퍼부었다. 고흐는 나름대로 감자먹는 사람들로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지만 테오에게 보낸 그림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감자먹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준 호르트 가족 중에 결혼하지 않은 딸인 시엔이 임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흐가 헤이그 시절에 동거했던 매춘부 시엔과 이름이 같기는 했지만 고흐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뇌넨 사람들은 고흐가 괴상한 차림에 해괴한 기행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 일을 고흐의 소행이라 믿었다. 이리 되자 뇌넨의 신부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흐의 그림 모델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고 고흐는 뇌넨에서 더 이상 인물화를 그리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고흐는 안트베르펜으로 옮기기로 하고 1885년 연말에 뇌넨을 떠났다. 뇌넨을 떠나기 전 고흐는 아인트호벤의 케세르마케르스라는 사람에게 찾아가 직접 그린 가을 풍경화 한 점을 선물로 주었다. 케세르마케르스가 왜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것은 사실 필요없다. [[예언|나중에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그림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만일 오래 살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 보일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1885년 11월, 서른 두 살의 고흐는 유럽의 주요 항구 도실 분주하고 활기 넘치던 안트베르펜에 도착한다. 이 곳은 17세기 바로크 화가를 대표하는 루벤스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고흐는 '스테인성', '빨간 리본을 한 여자', '노인의 초상화',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의 머리' 등을 그렸다. 이 작품들은 모두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